증명하지만 믿을 수 없다(18)-제논의 역설(1)

제논역설1

고대의 역설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제논의 역설입니다. 제논의 역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직접적인 저작은 전해지지는 않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 네 가지를 소재로 하여 제논의 역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역설은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와의 경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주 날랜 아킬레우스와 아주 느린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한다. 거북이는 아킬레우스보다 앞쪽에서 출발한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처음 위치에 이르면 거북이는 앞으로 가 있을 것이다. 다시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새로운 위치에 이르면 거북이는 다시 조금 더 앞에 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리는 동안 거북이 역시 움직이므로 이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따라서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제가 이 역설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신기하였었는데 많이 들어보셨을 역설이기 때문에 결론으로 급히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결론은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도 있고 따라 잡을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까 오히려 역설이 맞다라는 쪽입니다.
보통 이야기되는 이 역설의 해결은 1800년대 초반기에 무한급수에 대한 생각이 정립되고 나서야 가능했다는 다음과 같은 주장입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각각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상황을 생각합니다. 위치와 시간 사이의 관계를 그래프로 그려가면서 따져보겠습니다. 처음 위치를 표시합니다. 시간이 흘러 아킬레우스가 거북이의 위치에 도달했고, 다시 새로운 거북이의 위치에 도달합니다. 이런 과정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그래프로 살펴보니 중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 있죠? 그런 과정은 유한한 시간 안에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무한히 계속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수학자들은 정확히 그림에 나타난 이 계산, 즉 무한한 덧셈을 계산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논의 역설에 대한 비판 중에서 제 마음에 가장 깊이 들어왔던 주장은 1883년 무렵에 재출간된 희랍철학사의 저자 젤러 교수의 다음과 같은 비평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가분가능성을 무한히 가분된 것으로 혼동…..
무한한 가분가능성 =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
무한히 가분된 것 = 무한히 나누어진 결과물
즉 어떤 것이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것 자체가 무한한 것인가? 즉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것은 꼭 무한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유한한 것이 무한가분성을 가질 수 없는가?라는 질문들을 제논에게 할 수 있다라는 지적입니다.
저는 젤러 교수의 지적이 가장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기존의 역설 해결 논리들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또한 저의 생각입니다. 역설은 어떻게 해결되었나요? 역설 해결에서 숨겨진 일등 공신이 있습니다. 바로 “일정한 속력으로”라는 부분입니다.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북이는 항상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여전히 생각하고요, 대신 아킬레우스의 속력이 점차 느려진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경주가 시작되어 아킬레우스는 1초 만에 거북이의 위치로 달려갔습니다. 그동안 거북이는 일정한 자신의 속력으로 1초 움직였습니다. 아킬레우스가 이번에는 1/2초만에 그 자리로 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거북이는 1/2초 동안 자신의 속력으로 움직였습니다. 조금 힘이 빠진 아킬레우스는 1/3초만에 그 거리를 쫓아 갔습니다. 분명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보다 빠른 거죠? 거북이가 1/2초 움직인 거리를 1/3초만에 쫓아갔으니까요. 하지만 거북이는 1/3초 동안 앞으로 움직여갔네요. 이번에는 아킬레우스가 1/4초 만에 그거리를 쫓아갔다고 해 보죠. 역시 거북이보다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잡기 위해서 아킬레우스가 움직여야 할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1+1/2+1/3+1/4….
다른 영상에서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조화급수네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킬레우스는 느려지고는 있지만 언제 보더라도 거북이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고, 그런데도 제논의 거북이는 항상 앞서 있습니다.
어떤가요? 역설은 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사실 “일정한 속력으로”라는 새로운 가정이 들어가 있던 것입니다. 숨겨진 가정을 가져와서야만 역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역설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요?
역설은 해결되지 않았고 해결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는 한 가지 이유를 더 말해 보겠습니다. 유리수 집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리수 집합은 사칙연산을 할 수 있다와 하나의 순서로 배열할 수 있다라는 두 가지 성질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수 집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실수 집합은 유리수 집합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유리수와 다른 실수의 근본적인 성질을 보여주는 공리가 완비성의 공리입니다. 한 마디로 항들이 서로 한 없이 가까워지는 수열은 반드시 수렴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해서 살펴야 할 사항은 이것이 공리라는 겁니다. 공리라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수렴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수렴해야 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제논의 역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가까워진다고 해서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으며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역설은 살아 있습니다.
다음 영상에서 제논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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